넷플릭스의 화제작 "수리남"을 봤습니다.
보기 전에 접한 여러 리뷰에서 평가가 엇갈리길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미국 넷플릭스에서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어서 몇 주 동안 드라마 순위 10위에 위치했던 이유가 있더군요.
초반은, 특히 1편은 조금 느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의 배경을 내레이션으로 끌고 나가는 연출, 과도할 정도로 상세하고 느린 전개 인다데가 배경 자체가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죠. (범죄와의 전쟁, 마약왕, 등등)
하지만 이게 단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넷플릭스에 공개되는 많은 작품은 단지 우리나라 시청자만이 타겟이 아니기 때문이죠.
해외의 시청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우리나라의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천천히 (그리고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중에는 바로 해외 시청자를 배려한 '과도한 친절함'에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면에서 수리남 역시 초반에 배경을 세팅하는 게 좀 느리긴 하지만, 해외 시청자들을 위한 배경 전달로서는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6부작 드라마화가 된 덕분이기도 하겠지요.
중반은 아주 꽉찬 연기와 스파이 찾기가 맞물리면서 아주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후반은... 호불호가 조금 있겠더군요.
그럼 본격적인 스포일러 리뷰를 이어보겠습니다.
이건 좋았다!
1. 불꽃 튀는 연기 대결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겁니다.
하정우, 황정민, 박해수, 조우진의 황금 라인업이 펼치는 연기대결은 근래에 본 적이 없는 축제였습니다.
단순히 네임밸류만이 아니라 명불허전의 연기력에 감탄했습니다.
이런 종류 연기에는 도가 튼 황정민은 지금까지 맡아온 캐릭터들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온도를 내는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사기꾼이지만 계속 사이비 교주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간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정우도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와 비슷하면서도 더 몰입감 있는 연기가 좋았습니다. 아주 가끔 하정우와 캐릭터가 겉돌 때가 있는데 이번 작에서는 정말 '강인구'가 된 듯한 딱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박해수는 기본적으로 튀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중심을 잘 잡아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점을 확실하고 영리하게 이해한 느낌이었죠. 물론 구사장으로 분했을 때의 일부러 오바하는 연기도 딱 적절한 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우진은 가장 화제가 되는만큼 더할 나위 없는 연기였습니다. 워낙 연기를 잘하시는 분이라 당연히 잘하겠거니 했지만, 제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더군요. 특히 조선족으로 분했을 때의 그 표정, 눈빛, 말투는 정말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고 위험한 느낌이 들더군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 나왔습니다.
옥상 결투씬은 영화 '황해'에서 김윤식 배우의 돼지뼈 액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액션 시퀀스가 좋았다기보다 조우진 배우의 표정과 거친 호흡이 멱살 잡고 끌고 간 특이한 경우죠.
유연석 배우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제가 슬의생 말고는 유연석 배우의 연기를 본 적이 없어서 섣부른 판단은 이르지만, 아직 비열한 악역을 소화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톤은 대체로 어색하고 때때로 과장된 느낌이었습니다. 능글맞은 미소가 억지로 짜낸 듯한 느낌이 들었죠. 특히 데이빗 팍이라고 하기에는 영어가 매우 아쉬웠습니다. 다른 배우들이 한국식 영어를 자연스럽게 소화한 반면 미국식 영어를 해야 하는 인물인데, 유연석 배우의 영어 연기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나 할까요. 발음에 신경 쓰느라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톤을 사용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에 봤던 처참한 망작 "카터"의 주원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차라리 과감하게 어설픈 영어 사용을 빼고 한국말로 껄렁거렸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영어를 쓰더라도 한국식 발음으로 편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모든 한국계 미국인이 영어 발음이 완벽한 건 아닐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촬영 당시에 슬의생 촬영도 병행된 모양인데 본인이 너무 상반된 역에 혼란을 느낀 것은 아닐까.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에 밀려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좋은 작품에 출연한 건 좋았는데 너무 무리를 한 느낌이랄까요. 다음 작품에서는 조금 더 집중하고 발전된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2. 마약물인데 마약이 주가 아닌 전개
마약물 혹은 나르코 계열의 영화나 드라마는 '마약' 얘기에 쉽게 빠져듭니다. 주인공이나 악역이 마약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들 말이죠. 자극적이고 일어날 법한 전개니까요. 특히, 영화 '마약왕'이 그러했습니다. 뭐, 실화 기반이니까 진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마약왕'은 마약으로 서서히 몰락하는 주인공에 집중했었죠. (그리고 지루했죠)
"독전"도 괜찮은 영화지만, 중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악역이 약쟁이로 나오죠. 약에 취했으니 미친놈이고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클리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런 얘기들에 많이 노출되어 왔습니다. 마약에 빠지는 주인공, 악역, 개싸움, 약 때문에 저지르는 배신, 죽음.. 이제 좀 식상하죠.
반면 '수리남'은 마약 거래상이 주요 인물이고 소재이지만, 마약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범죄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잠입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첩보물에 가깝죠. 마약은 그저 범죄조직의 돈줄인 거지 마약으로 인한 지저분한 얘기가 별로 나오지 않죠. 그래서 인물 간의 관계와 속고 속이는 첩보의 긴장감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악역인 '전요환'도 약에 취해서 미쳐버린 케이스가 아닌 게 좋았습니다. 그는 약쟁이가 아니고 철저한 사기꾼이고 또한 비즈니스맨이죠. 약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득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무섭고 현실적인 캐릭터가 되었다고 봅니다.
3. 마약물인데 해피엔딩
뭐,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하실 분도 많겠습니다만. 마약을 주로 다룬 작품 중에서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라고 봅니다. (물론 주인공 기준의 해피엔딩이겠습니다만) 주인공도 이런저런 유혹이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가정으로 돌아왔고. 보통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기 마련인 '스파이'도 다리에 총은 맞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중간중간 '전요환'이 '강인구'나 '구사장'에게 몰래 마약을 먹여서 상황을 악화시킬 걸 기대(?)했는데 그런 막장 전개는 없었고 말이죠.
이건 암울하기만 한 여타 외국의 마약물에 비해 신선하고 좋은 전개였다고 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이 악물고 고난을 이겨낸 한 남자의 이야기니까요.
이건 아쉬웠다!
1. 주인공의 애매한 태도
하정우 배우의 연기도 좋았고, 결국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구'라는 캐릭터의 스토리도 좋았습니다만, 이 주인공을 이끄는 동력이 잘 설명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주인공은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냐는 겁니다.
돈 때문이라기에는 커다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도덕성이라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총질을 합니다. 친구의 복수라기에는 중간에 전요환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습이 어색하고, 가족을 위해서라기에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간과하는 모습이고요. 어느 순간에는 프로젝트와 전요환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인생이 한 가지 감정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런 거지만... 창작물은 다르죠. 작품 속 주인공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욕망', '동기'가 뭔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욕망이 없다기보다 너무 여러 가지가 얽혀 있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느낌이랄까요. 어느 순간에는 돈이 중요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친구 복수가 중요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냥 집착하는.. 중구난방인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단점을 하정우 배우의 연기력과 쉴틈 없는 전개로 잘 느끼지 못하게 끌고 나가긴 합니다만, 결국 맨 마지막에 그 단점이 드러나고 맙니다.
2. 최후반의 결투씬
앞서 말한 대로 '강인구'라는 캐릭터가 왜 이렇게까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위험에 뛰어드는지, 왜 국정원도, DEA도 못하는 걸 제이슨 본처럼 쫓아가서 끝장을 내는지, 왜 전요환을 막기 위해 서슴없이 기관총을 갈기는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군대를 갔다 왔어도 몇 달 전까지는 민간인 아니었나요? 작전 성공하려면 전요환을 생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연출로 극복한 게 아니라 하정우 배우의 눈빛으로 극복한 갭이었죠.
그러다 보니 맨 마지막 강인구의 차량 추격전과 늪지에서 전요환과의 주먹다짐이 뜬금없게 느껴진 듯합니다.
막무가내 액션이라도 이게 주인공의 상황과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몰입이 100%라면 '그래, 쫓아가! 가서 끝장을 내!'라고 응원하게 될 텐데. 이유를 모르니까, '야, 니가 간다고 뭐 되겠냐? 주인공이니까 총알 다 피하고, 다 죽이고 되네.. 이거 람보였나?' 하는 느낌이 들고 맙니다.
그렇다고 액션 연출이 세련된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올드합니다. 예전 "군도" 때도 느낀 건데 윤종빈 감독은 액션 연출에 특화된 감독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결국 최종 결투 직전까지는 꽤 현실적인 마피아/느와르/첩보물 톤을 잘 가져가다가 갑자기 B급 액션 영화처럼 끝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3. 피해자에 대한 예의
"수리남"은 실화를 바탕으로 많은 각색이 들어간 작품입니다만. 실제로 해당 인물과 사건으로 인해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거나 심지어 끌려와서 학대당하는 사람들까지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이런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빠르게 잊혀집니다. 갑자기 악인끼리 치고받다가 끝나는 "아수라"처럼 후르륵 전개되어버리죠. 전요환에게 세뇌당하고 이용당한 피해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나중에 코멘터리 영상을 보니 주인공에 집중하기 위해서 구출 장면을 촬영하고도 편집했다고 하는데.. 에필로그 형식으로라도 나왔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니, 어린아이가 마약을 탄 음료수를 강제로 마시고, 주인공에게 살려달라고 얘기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의 생사가 어찌 됐는지 언급조차 안 하는 게 무슨 경우인지.. 그저 주인공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장치라기에는 너무 과한 느낌이죠.
실제 피해자가 겪은 일과는 다른 각색이지만, 피해자가 있는 실화 배경이라면, 또 그런 부분을 시청자에게 보여주었다면 그런 피해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마무리를 맺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요환' 그리고 실제 가해자인 '조봉행'이 고작 10년 형을 선고받은 걸 생각하면 피해자의 결말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수리남의 후반부가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바입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언급했지만, 이런 단점이 작품을 보면서는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시나리오, 맛있는 대사, 역대급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총괄 프로듀서가 있고, 에피소드 별로 감독을 분리하면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윤종빈 감독 혼자서 다 하려니 무리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홈런을 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더 신선하고 좋은 작품이 나오고 또 전 세계에서 사랑받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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