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님의 소설 하얼빈을 읽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가 쓴 안중근 의사의 얘기인 만큼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흡입력이 압권이었습니다.
특히 후반부는 책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고 엄중한 이야기였습니다.
항상 구름 속 영웅이라는 느낌만 있던 안중근이란 인물을 서른한살의 청년으로 이해하게 되는 시도도 새롭고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책이 김훈 작가님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의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식견과 짧은 독서경험, 그리고 하얼빈을 단 한번 읽은 것으로 감히 이런 의견을 써도 되는가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만...
무식함을 용기로 제 감상을 써보겠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얼빈은 크게 세가지 파트로 나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의 발자취 (그리고 운명의 꼬임)
2. 안중근의 고뇌, 그리고 결심
3. 거사, 이후 재판 이야기
여기서 단연코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파트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고 재판을 겪는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압도적입니다.
역사에 남아 있는 재판 과정이 김훈 작가님의 사실적인 문체를 만나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장에서 남긴 말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그분의 기개, 의지, 결연함 앞에서 하루하루 무심하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청년으로서 안중근이 느꼈을 고뇌와 번뇌도 잘 녹아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서만이 아니라 서른한살의 청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에 사형 집행 후 이후로 짧게 나열되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가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번째 파트도 좋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불현듯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고 거기서 우덕순을 만나 거사를 결심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황무지 같은 안중근의 내면 세계, 어딘가 충동적이고 급작스런 행동들, 자신의(그리고 주변 사람의) 안위보다 하고자 하는 혹은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중요시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안중근 의사가 서른한살의 청년이었음을 (당시 서른한 살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겠으나)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단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결심하는 배경이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으로 묘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잘못 읽은 것일까요...)
이토의 나라에서 살 수 없는, 이토의 작동을 멈춰야만 할 것 같은 기분/느낌으로 거사를 결심하는 것이
마치 역사적, 민족적 대의를 위한 결심보다는 세상에서 들뜬 자로서의 반작용처럼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거사 직후 '코레아 후라'를 외친 것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일관되고 논리적으로 정치적 주장을 펼친 점, 그리고 감옥에서 집필하려고 한 '동양평화론' 등을 미뤄봤을 때 안중근 의사는 명분과 대의에 대해서도 매우 깊게 고민했을 텐데 말이죠.
(실제로는 우덕순과만 거사를 행한 게 아닌 점도 그렇고, 총을 한 자루만 준비하지 않은 점 등을 보아도 거사는 충동적이기보다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소설은 소설인 점을 인지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번째 파트는 한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의 깊은 내면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 훌륭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좀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나 다른 주변 인물이 나오는 부분은 괜찮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자세히 다루는 부분들이 저에게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필력이나 글 자체가 아쉽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작가님의 너무나 좋은 필력으로 이토를 (이름만 부르는 것 자체도 어색합니다만) 담백하게 다루는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달까요.
이토 히로부미는 어떻게 평가하든 간(온건파든 뭐든)에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한민족을 수탈한 원흉입니다.
한일병합,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확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이죠.
그런데 이 인물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니 한 개인으로 읽히게 됩니다.
이토는 단순히 절대악이 아니라 나름의 지조가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스스로 믿는 대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련하게 지시하는 그런 수완가처럼 보입니다.
무능한 조선/대한제국의 왕실, 정치인, 학자들과 달리 매우 뛰어난 지략가로 보입니다.
위스키를 즐기고 요정을 돌아다니며 기생을 품는 (흠결이기도 하지만) 왠지 풍류를 아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토에 대한 묘사와 서사가 안중근에 대척점에 있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면 성공적이지만
저는 그 시도 자체가 주는 의미가 두려웠습니다.
소설이라는 픽션의 틀에서도 히틀러나 빈 라덴이나 푸틴이나 북쪽의 김 씨 부자들을 '인간'으로서 다루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배경과 고민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악을 저질렀기 때문이죠.
이토 히로부미가 히틀러나 북쪽의 김씨 부자들만큼 악인이라 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에서 다뤄지는 이토 히로부미는 너무 유능하고, 가깝고, 인간답게 느껴져서 두려웠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일말이라도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물론 저처럼 역사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나 헷갈리는 지점이겠지만.. 그런 부족한 저와 같은 독자도 있다는 점에서 하얼빈이 주는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가 이토 히로부미 파트에서만큼은 아쉬웠습니다.
그가 한 짓이 무엇이었는지 조금더 의견을 담았으면, 조금 더 한쪽으로 기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소설적인 완성도는 매우 매우 뛰어났습니다.
특유의 건조한 문체에서 나오는 서늘함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작가가 대놓고 말해주는 게 아니라 독자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더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어쭙잖은 감상이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해석한 부분이 있을까 봐 책을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내용을 떠나서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훌륭한 문장으로 가득하니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겠죠.
여러분도 부디 이 책을 읽어보시고 역사에 대해, 인간 안중근에 대해,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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